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시점이 언제 일까요?
첫째는, 선악과 열매를 보고 탐욕을 느낄 때, 둘째는 나무 가지를 자르고 열매를 취할 때, 셋째는 먹을 때 , 넷째는 서로 변명할 때….혹자는 여기서 정답은 첫째도 둘째도 아닌 세번째 먹을 때라고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나님의 말씀이 먹지말라고 하셨으니 비로소 먹을 때 죄가 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탐욕을 가질 때 죄가 된다고 하셨으니 그 이후부터는 탐욕을 가질 때부터 죄가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법학을 전공하고 40년동안 검사로서,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죄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다. 자신이 없다는 증거이다. 과연 인간의 죄와 허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다고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은 때를 죄의 싯점으로 보기에는 육의 눈으로 보아도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문리적으로 보면 열매를 먹지말라고 하셨으니 말그대로 먹은 때 죄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의지를 주셨다. 그래서 행동으로 나올 때에는 내면의 의사결정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그래서 우리 형법에서는 내면의 의사가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때는 범행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내면의 의사만으로는 처벌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법률은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말았다. 보기에 좋고 먹음직스러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보고 탐심을 가지고 말았다. 하나님 이외 다른 것에서 아름다움을 알고 만족감을 취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다니엘(단 6:22)과 바울(행 16:25)과 같이 우리들을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장수하게 하시고 만족하게 하신다.(시 91:16) 그러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원천을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만족을 찾으려는 인간의 마음이 죄의 근본이 된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은 하나님 이외 선악과 나무 열매를 보고 탐욕을 가졌다, 하나님 보다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열매를 따먹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일단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것에 만족을 찾으려 할 때 이미 인간은 죄를 지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열매를 따서 먹은 것은 죄의 결과일 뿐이다.
다윗은 밧사바를 강간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 행위법으로는 강간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께 지은 죄라는 것을 알았다.(시 51:4)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 하나님과 등을 진 것이 죄라는 것이다. 강간죄나 살인죄는 하나님을 등진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 줄을 알고, 그 죄를 자신의 눈 앞에 항상 두겠다고 고백한다.(시 51:3)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에도 그랬다.
구약 시대에는 열매를 따먹을 때 죄가 되고, 신약 시대에는 그에 앞서 탐욕을 가질 때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다른 것에 만족을 취하려는 탐욕을 가질 때 이미 범죄가 되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만 생명이 있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된다.
육신의 법은 행위의 결과로 논하지만 영의 법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마음을 가질 때 죄가 된다. 육신의 법은 사망의 법이지만 성령의 법은 살리는 법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